아노미는 원래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튀르켐이 제창한 개념이다. 보통 ‘무규범’, ‘무규칙’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히려 아노미가 초래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본래의 맥락을 존중해 풀이하면 ‘무연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p221
뒤르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컨대 ‘사회의 규제와 규칙이 느슨해져도 개인이 반드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불안정한 상태에 빠진다. 규제와 규칙이 느슨해지는 현상이 꼭 사회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는 점이다. 국가가 아노미 상황에 빠지면 각 개인은 조직이나 가정에 대한 연대감을 잃고 고독감에 허덕이며 사회를 표류 하게 된다. 포스트 업무 방식 개혁의 그림치고는 어딘가 쓸쓸하다. -p223
가족도 소셜네트워크도 직업 별 길드도, 그것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참가해서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성립한다. 지금은 바야흐로 그렇게 해야만 스스로 아노미 상태에 빠질 위험을 막을 수 있는 시대다. -p226
만약 자신의 능력이나 감성에 대해 희소성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격표도 붙이지 않은 채 증여하고 답례로 약간의 선물을 받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가령 ‘이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 음악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팬을 천 명 지닌 음악가라면, 그 팬들에게 한 달에 1만원 씩 기부금을 받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증여와 감사의 교환을 바탕으로 한 관계는 증여한 사람에게 매우 건전한 만족감과 자기효력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무척 가슴이 설렌다. -p231
보부아르는 저서 ‘제2의 성’ 앞머리에서 그 유명한
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격언으로도 간결하고 알기 쉬워서 20세기 후반에는 다양한 상황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즉 보부아르는 생물학적인 여성과 사회적인 여성을 규정한 후에
라고 지적했다. 이 지적은 보부아르가 살아갈 당시의 프랑스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여성다움을 획득하라는 압력’의 시대와 사회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생각해 보면 무척 흥미롭다. -p233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라는 개념이 지금 왜 중요한 것일까? 이는 아사다 아키라의 저서 ‘도주론’에서 발췌한 다음 부분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각각 뜻을 살펴보면 파라노이아는 편집증을, 스키조프레니아는 분열증을 말한다. 파라노이아는 무엇에 편집하는 걸까? 바로 ‘아이덴티티 Identity’다. 파라노이아형 인간은 이를테면 ‘ㅇㅇ대학교를 졸업하고 ㅇㅇ대기업에 근무하며 ㅇㅇ동네에 살고 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집착하고 이 정체성을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새로운 정합적 특질을 획득하는 데 매진한다. 인생에서는 종종 우발적인 기회나 변화가 나타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기회와 변화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축적해 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와 꼭 들어맞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렇게에 파라노이아형 인간은 타자가 보기에는 ‘일관성있고 알기 쉬운 인격과 인생’이다. -p238
가장 기본적인 파라노이아형의 행동은 ‘정주’하는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그곳을 중심으로 영토의 확대를 꾀하는 동시에 재산을 많이 축적한다. 아내를 성적으로 독점하고 태어난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가정의 발전을 위해 애쓴다. 이 게임은 도중에 그만두면 지는 것이다. 그만두지도, 멈추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파라노이아형이 되고 만다. 병이라고 하면 병이지만, 근대 문명은 틀림없이 이러한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여기까지 성장해 온 것이다. 그리고 성장이 계속되고 있는 한, 힘들기는 해도 그 나름대로 안정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사태가 급변하기라도 하면 파라노이아형은 약하기 그지 없다. 자칫하면 성체에 틀어박혀 전력을 다한 끝에 목숨을 바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이 녀석은 무슨 일이 있으면 도망친다. 버티지 못하고 일단 도망친다. 그러려면 몸이 가벼워야 한다. 집이라는 중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에 몸을 둔다. 재산을 모으거나 가장으로서 처자식에게 군림할 수는 없으니 그때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이용하고, 자손도 적당히 뿌려 두고 그다음은 운에 맡긴다. 의지가 되는 것은 사태의 변화를 인식하는 센스, 우연에 대한 직감, 그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스키조프레니아형이라 할 만하다. - 아사다 아키라 ’도주론’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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