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란 동일시와 차별화의 이중 작용을 통해형성되며, 한번 정해지면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집단 속에서 동일시와 차별화가 실천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p252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싶고 그것을 타인으로부터 확인 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고프먼에 따르면,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타인에게서 확인받지 못하면 불안감이 생기고, 자시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기도 한다. 지인의 반응이 전혀 없는 게시 글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에인들에게 파파라치는 필요악이 되었다. 사생활을 침범하는 성가신 존재이지만 파파라치 덕분에(?) 공적 공간에 게재되는 사생활은 그들의 인기를 확인하고 더 많은 관심을 끌게하는 콘텐츠로 탄생한다. 감출수록 드러나고 더 보고 싶어진다. 홈페이지에서는 개인화와 사회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헤어진 연인들에게 미니홈피는 서로를 홈쳐보고 집착하는 강력한 마약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카카오톡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드러내고 감시하고 숨기면서 소셜 게임을 벌이고 있다. ‘보여지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정체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p268
다만 이 과정에서 콘텐츠가 범람하고 사생활이 노출되고 익명성은 보장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도처의 공적 장소에서 기꺼이 벌거 벗겨짐으로써 가시성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 할 것이다. 공적공간을 최대한 확장하면서도 사적 공간을 보장받을 방법을 계속 찾게 될 것이다. ‘도처에 있으면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연결이 지배하는 미디어 세상, 그래서 더 이상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화두다. -p270
지금까지 프라이버시 문제는 새로운 기술의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정리했듯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이 사라진 곳에서 누군가 여러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이제 모든 종류의 콘텐츠가 스트림으로 섞여 흐른다.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공유하고 구경하면서 정신없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자라난다. 이것이 오가닉 미디어다.
공간으로 정리 정돈되었던 구획이 이제 더는 없는 것이다. 대신 무한대의 네트워크에 노출된 내가 있다. 세상은 유리처럼 투명해졌고 여기서는 국가든 개인이든 조직이든, 강제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지키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 -p284
투명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어떤 스토리를 만들 것인가?’가 바른 질문이다.
이 새로운 문제 정의가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스토리의 주인이 됨으로써 투명성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신의 스토리, 그리고 당신 조직의 스토리는 무엇인가?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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